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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이 조선인을 잡는, 잔혹했던 '간도특설대'

조선인이 조선인을 잡는, 잔혹했던 '간도특설대'

ⓒ이수진 민주당 당선인 지난 24일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당선인이 ‘친일파 파묘(破墓)’ 이슈를 꺼낸 뒤 백선엽 장군(예비역 대장)의 사후 국립현충원 안장 문제를 두고 여야가 충돌하고 있다. 여당은 친일행적(간도특설대)을 문제 삼았으며, 야당은 6·25 전쟁 일등공신으로 치켜세웠다. 김홍걸 민주당 당선인은 28일 페이스북에 백선엽 장군은 “친일파 군인들의 죄상은 일제강점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고 한국전쟁 중 양민학살이나 군사독재에 협력한 것도 있다”며 “전쟁 때 세운 전공(戰功)만으로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국립현충원 안장 반대를 의사를 밝혔다. 이어 “일본에서 발행된 백 장군의 책을 보면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그 때문에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며 만주군 간도특설대 시절 본인의 친일행적을 고백하는 내용이 있다”고 지적했다. 또 “우리가 친일파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일본 군인이 되겠다고 입대한 사람들”고 강조했다. 그러나 야권에선 일부의원들은 호국영웅이라는 단서를 달고 이같은 주장을 강하게 반박했다. 하태경 미래통합당 의원은 같은 날 페이스북에 “백 장군은 6·25 전쟁 일등공신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만든 호국 영웅”이다. 윤상현 외교통일위원장도 “백 장군은 6·25전쟁에서 나라를 구한 은인으로서 서울현충원에 자리가 부족해도 어떻게든 만들어서 모시는 게 나라다운 책무이고 예의며 품격”이며 “백 장군을 서울현충원에 모실 수 없다는 문재인정부 국가보훈처의 넋 나간 조치는 당장 취소돼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원희룡 제주도지사는 여기서 더 나아가 백 장군을 대한민국을 구한 ‘6·25의 이순신’이라고 평가했다. "인간도 아니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잔혹한 조선인이 조선인을 잡는 '간도특설대'였다. 간도특설대가 창립된 초기의 지휘부. ⓒ서해문집 일본제국주의는 악랄하게도, "조선인 독립군을 조선인으로 잡아야 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이에따라, 만주에서 활동하는 항일 조직을 토벌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즉 “간도특설대”는 “정규부대”가 아니라, 민간인으로 구성된, 항일독립군과 항일조직을 소탕, 체포, 와해하기 위한 특수목적 부대였다. 비록, 부대장은 일본인이었으나 장교 및 병사들도 조선인들이 대부분 맡았고, 친일 조선인으로 구성된 지원병이었다. 부대원들은 “인간도 아니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철저하고 잔혹한 토벌을 실시해서, 일제로부터 많은 훈포장을 받았기에, “간도특설대”에 몸을 담았다는 것으로 바로 “민족반역자”임을 판단할 수 있다. 즉, 일단 “간도특설대‘ 여기에서 복역했으면 무조건 ”친일 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간다. "간도특설대" 만큼은 마지막 까지 충성을 다했다. 간도특설대 1기 지원병 228명의 입소식을 알리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1938년 12월 4일자 보도. ⓒ서해문집 악명높은 “간도특설대”는 1938년도에 관동군 “간도특무기관장” 오코시 노부오 육군중좌의 통제 아래 창설되었으며, 1939년부터 활동이 시작되었다. 주로 만주 동쪽에서 활동하다가 1943년 말에는 열하성으로 이동해서, 조선인 독립군 보다는, 팔로군을 비롯한 항일부대 토벌 작전에 투입 되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했음에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임무를 수행하다가, 팔로군으로부터 패망 소식을 듣고, 부대를 해산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해산한 이후에도, 일부 병력은 조선인 선임장교의 지휘 아래서, 끝까지 일제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않았다. 1945년 8월 소련의 대일 참전이 시작되면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조선인이 포함된 많은 부대에서 독자 행동이 속출했지만, 간도 특설대만큼은 마지막 까지 충성을 다했다.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했던 대원들은 해방 후 과거를 숨기고 신생 대한민국의 국군에 들어갔다. 교통부장관 시절 백선엽 장군이 1969년 9월 일본을 방문해 옛 만주군 상관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앞줄 한 가운데가 백선엽이다. ⓒ서해문집 광복 이후 “친일 반민족행위자” 청산이 무산되고,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했던 대원들은 해방 후 과거를 숨기고 신생 대한민국의 국군에 들어갔다. 이들 중 상당수가 장관, 군사령관, 고위 관료로 출세했다. 해병대의 경우 신현준, 김석범에 이어 김대식 등 간도특설대 출신이 사령관을 맡는 진기한 기록을 세웠다. 이들 중 일부는 과거를 지우기 위해 이름을 바꾸는 경우도 있었으나 누구 하나 자발적으로 당시의 일을 고해하거나 참회한 인물은 한 명도 없었다. 가장 유명한 인사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백선엽 장군이다. 그는 간도특설대 복무와 관련해 국민들에게 진지하게 설명하거나 사죄한 적이 없다. 그나마 일본에서 일어판으로 발간한 '대 게릴라전-미국은 왜 졌는가'에서 변명을 늘어놓았다. 백선엽장군 회고록 중에서 ⓒ민족문제연구소 "우리들이 쫒아다닌 게릴라 가운데 조선인이 많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에 차이가 있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요구하며 싸우고 있는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하려는 일본의 책략에 그대로 끼인 모양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진지하게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진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들이 역으로 게릴라가 되어 싸웠으면 독립이 빨라졌으리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그래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고 비판받아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게릴라전이 전개된 지역의 참상을 알게 되면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 이해될 것이다". “간도 특설대” 출신자들은 이전의 실전 경험을 활용해 6.25 때 공을 세웠다. 그 중 상당수가 국군의 해병대와 육군의 지휘부로 자리잡았다.(특히 백선엽은 참모총장을 엮임하고, 최초의 4성장군이 된다) 이들 “간도특설대” 출신은 이후에도, 반세기가 넘는 동안 국군 내부의 친일파 임에도, 지금까지도 “민족 반역자”라기보다는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다만 대한민국 해군만큼은 초창기부터 독립운동가 출신인 손원일 제독이 지휘했고, 해군에 남아 있던 일본군/만주군 출신 친일파 군인들의 대부분을 새로 창설된 해병대로 몰아넣어 버렸기 때문에 그 잔재가 덜한 편이라고 한다. 간도 특설대, 복무 경력의 "한국군 주요인사" 1) 신현준(초대 해병대 사령관) : 간도 특설대 창설 요원. 두차례에 걸쳐 3년 4개월 근무. 2) 김석범(2대 해병대 사령관) : 간도 특설대 부(副)대장, “만주국군지”를 썼다. 3) 김대식(3대 해병대 사령관) 4) 송석하(예비역 소장) 5) 김백일: 김백일의 본명은 '김찬규'로 만주군 장교로 복무한 경력이 있는데, 특설부대 창설 때부터 활동해왔던 인물로 일제 패망 때까지 “간도 특설대”로 복무했을 만큼(패망 당시 계급이 대위였다.) 가장 커다란 활동을 했다고 한다. 광복 이후에는 자신의 만주군 장교 시절을 감추고 싶었던지 '청천백일'의 '백일'로 이름을 바꾸고 월남했다. 6) 백선엽(육군 예비역 대장) : 1943년 2월 부임. 열하성 쪽으로 이동하여, 팔로군과 전투에 종사. 7) 정일권(참모총장) : 간도 특설대 복무 경력 의혹이 있다. 아무튼, “간도 특설대”의 구성원은 장교는 물론, 부사관, 사병까지 전원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되게 되어있다. 징병이나 학병 등 이런저런 상황으로 인해 어쩔수없이 일제를 위해 싸우게 된 다른 부대의 조선인들과 달리, “간도특설대”는 사병, 장교 가릴 것 없이 이 부대에 소속되었다는 것 자체가 독립군 탄압을 위한 “명백한 자발적 친일 행위”이기 때문이다. 항일세력을 색출한다는 이유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살상, 강간, 약탈한 것으로 더 악명이 높다. ⓒMBC 항일세력을 색출한다는 이유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살상, 강간, 약탈한 것으로 더 악명이 높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간도 특설대에게 살해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하며, 이외에도 수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포로가 되거나 강간, 약탈,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만행은 다음과 같다. 1) 1939년 5월 일본수비대와 함께 안도현 서북차에서 야간 토벌을 진행하던 중, 산나물을 뜯던 인근 마을의 민간인을 체포해 살해한 뒤 시신을 불에 태웠다. 2) 1939년 7월 1일 천보산 광산이 항일연군의 습격을 받자 천보산에서 교전을 벌인 뒤, 충혼비에 제를 지낸다는 명목으로 항일연군 전사자들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 빈 통조림통에 넣었다. 3) 1941년 겨울 안도, 돈화, 화전 등 3개 현에 대한 토벌을 진행하던 중 위장한 항일군 2명을 체포했다. 한 명은 탈출했다가 도목구 인근에서 다시 붙잡혔는데, 부관이었던 중위가 부대를 명월구 공동묘지 앞에 집합시킨 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군도로 그를 참수하고 시체 옆에서 목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4) 1941년 1월 안도현 대전자에서 동쪽으로 약 30리 떨어진 산림에서 붙잡힌 항일연군 여성 4명을 압송하던 도중 강간을 시도하다가 저항하자 살해했다. 5) 1942년 8월 차조구에서 정보를 수집하던 중 논밭에서 일하던 농민 두 사람을 불심검문했는데 양민증을 갖고 있지 않자 폭행한 후 체포했다. 6) 1944년 음력 7월 27일, 특설부대는 현지경찰과 합동으로 미윈 현 황거좡에 가 ‘식량 징수’(실제로는 식량강탈)를 하며 21명의 백성을 체포했다. 그중 한 농회 주임은 한달 동안 구금된 뒤 살해됐다. 7) 1944년 9월, 특설부대가 스샤 진에서 30리 떨어진 곳에서 몽골 기병과 연합해 팔로군을 토벌 했으며, 쌍방 교전중 특설부대가 참패 했다. 특설부대는 돌아오는 길에 스샤 진 서쪽 20리 되는 부락에서 농가 20호에 불을 지르는 보복을 했다. 8) 1944년 11월 5일 화이러우현 다슈이위(현재 베이징시 소속)에 주둔하던 만주군이 현성에 가 식량 운반을 하던 도중 팔로군의 습격을 받아 트럭 한 대가 소각되고 만주군이 몇 명 죽자, 만주군과 특설대 합동으로 일대를 토벌. 특설대는 현장 부근 마을에서 백성 두 명을 쏴죽이고 세명을 다치게 해 불구로 만들었다. 현재까지도, 간도에 있는, 조선족 가운데 일제강점기를 직접 겪은 80세 이상의 노인들은 “간도 특설대”라는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 정도라고 한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인민해방군으로 참전한 조선족 사이에서는 "남한으로 도망친 간도특설대 놈 들 잡으려고 자원입대했다.", "정일권, 김석범, 김일로 잡으러 가자."는 증언도 있다. 최근 만주벌판 현장을 답사하며 '간도특설대'라는 책을 저술한 언론인 김효순 씨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간도특설대가 민족의 자랑거리였느니, 민중의 편이었느니 하는 새빨간 거짓말이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 그래도 그 경력을 살려 '한국전쟁에서 공비를 토벌했다'는 말이 항일 영령을 악귀처럼 내쫒아버리는 전능의 부적으로 사용되는 시대는 끝나야 한다. 공비 토벌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박삼득 국가보훈처장은 백선엽 장군의 현충원 안장 논란과 관련해 현충원 안장 대상이 맞고, 다른 의견은 고려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박 처장은 어제(28일) 오후 미래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같이 밝히고, 서울 현충원은 장군 묘역이 자리가 없고 또 국방부 소관인 만큼 권한 밖이라며, 보훈처 소관인 대전 현충원에 안장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자료참고네이버 History2.기자의소리

'조선총독 폭탄의거' 강우규의사, 단두대에서도 그의 기개는 당당했다

'조선총독 폭탄의거' 강우규의사, 단두대에서도 그의 기개는 당당했다

강우규 의사 1919년 9월,식민통치의 중심인물이었던 조선 총독을 향한 폭탄 의거가 일어났습니다. 노년의 독립운동가였습니다. 함경지역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을 위한 망명 평남 덕천 출신의 왈우(曰愚) 강우규 의사는 개항 이후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전통적 학문의 한계를 절감하고 개화사상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선생은 1883년에 함경남도 홍원으로 거처를 옮겼는데요. 이곳에서 한약방을 경영하여 재산을 모아 교육 계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강우규 의사가 계몽운동을 전개한 데에는 을사늑약의 영향이 컸습니다. 또한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는 등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이끈 인물인 이동휘 선생에게도 영향을 받아 교육 계몽에 힘썼다고 합니다. 강우규 의사는 함경도 지역에서 사립학교를 세워 교육을 통해 민족을 일깨우고 교회를 건립해 기독교 정신을 펼쳤습니다. 이동휘 선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러나 강우규 의사를 비롯한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10년 대한제국은 경술국치의 치욕을 겪게 됩니다. 경술국치에 분개한 선생은 이미 50대였음에도 독립운동을 위해 북간도 화룡현으로의 망명을 택합니다. 망명 후 선생은 중국 관내 최초의 독립운동단체인 동제사를 조직한 박은식 선생 등과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합니다. 신흥동 건설과 대한국민노인동맹단 활동 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제정 러시아 정부는 일제의 영향으로, 연해주 일대에서 전개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을 탄압합니다. 어두운 정세 속에서 강우규 의사는 길림성의 요하현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이곳은 남만주와 연해주를 잇는 지리적 강점이 있으며,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구상하던 강 의사가 고려해온 곳이기도 했습니다. 의사는 민족부흥이라는 염원을 담아 한인 동포 마을인 신흥동을 건설하여 노령과 만주의 독립운동 세력을 연결하고자 했습니다. 광동학교를 건설하는 등 민족의식 고취에 힘쓰던 강우규 의사는 3.1만세운동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러자 의사는 광동학교 학생, 동포들을 규합해 독립선포식을 열고 요하현에서 만세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여 대한국민노인동맹단에 가입하고 요하현 지부장을 맡아 활동하였습니다. 대한국민노인동맹단명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임 조선 총독의 처단에 앞장서다 3.1만세운동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일제는 식민정책을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변경하고, 새로운 총독을 임명하여 우리 민족을 달래려 했습니다. 강 의사는 이러한 변화가 3.1운동을 무마하려는 일제의 술책에 불과하다는 것을 꿰뚫어 보고, 일제 척결에 대한 의지를 불태워 신임 조선 총독을 처단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의사는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다리에 폭탄을 차고, 원산으로 잠입합니다. 이후 서울로 이동한 의사는 신임 총독 사이토의 얼굴을 익히며 폭탄을 던질 위치를 답사하는 등, 본격적으로 거사 준비에 나섰습니다. 강우규 의사 의거지 ⓒ독립기념관 거사 당일인 9월 2일 오후 5시, 사이토 일행이 남대문역에 도착하자 강우규 의사는 마차를 향해 폭탄을 투척했습니다. 우리 민족의 분노와 독립의 염원이 담긴 폭탄은 비록 사이토 마코토 척결에는 실패하였으나 독립에 대한 우리 민족의 의지를 세계에 천명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강우규 의사의 수형기록표 ⓒ국사편찬위원회 강 의사는 굳은 의지로 다시금 거사를 계획했지만 9월 17일, 의거 16일 만에 서울 가회동에서 피체되었습니다. 의사는 일제의 법정에서 조금도 굴하지 않은 채 의연하게 대처하였고 이에 감화된 일본인 판사는 그를 ‘강선생’, ‘영감님’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1920년 2월 25일에 사형 선고를 받은 강우규 의사는 거사에 연루된 사람들을 변호하기 위해 항소를 하기도 했습니다. 강우규 의사 피체 기사 ⓒ보훈처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옥중에서도 강 의사는 청년들의 미래를 걱정하고, 독립의식을 고취하고자 하였습니다. 1920년 11월 29일, 강우규 의사는 그렇게 세상을 떠납니다. 사형이 집행되던 순간까지도 의사의 기개는 꺾이지 않았고, 짤막한 시를 남기고 의연히 순국하였습니다. 단두대 위에 올라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 순국 직전에 강우규 의사가 남긴 유시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1920년 4월 14일 경성지방법원 법정으로 얼굴이 가려진 채 들어서고 있는 강우규 의사. ⓒ동아일보 창간호 강우규 의사의 의거는 폭살에는 실패했지만 3·1운동 이후 최초의 의열투쟁 주인공이 백발노인임이 알려지면서 조선 청년들에게 끼친 영향은 컸고 이후의 의열 투쟁에 불씨가 됐습니다. 60대의 나이에도 과감히 폭탄 의거를 감행한 강우규 의사. 그의 빛나는 독립정신은 아직도 우리의 가슴속에 꺼지지 않는 불길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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