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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들을 위해 주막을 ‘연통제’로 ''독립운동가 김순이 선생''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주막을 ‘연통제’로 ''독립운동가 김순이 선생''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는 없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헌병은 즉결심판권이 있었다. 태형같은 형벌은 법 재판이 이루어지지 않고 바로 할 수 있었기 때문에수감기록이나 형무소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바로 이러한 부분 때문에 수많은 독립운동가 분들이 독립운동에 가담하였음에도 그것이 기록으로 남지 않아 현재 서훈을 받지 못하는 예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국가보훈처 법령에는 뚜렷한 공적이 있어야 서훈이 지정 가능하다는 문구가 있다. 그로 인해 뚜렷한 공적에 해당하는 수감기록 혹은 당시 신문 및 기타 매체에 언급이 되어야 그 증거자료로 서훈 자격요건이 해당한다. 현재 횡성군에서는 김순이 여사에 대하여 공동묘지에서 묘소를 이장하여 갑천면에 있는 한치 저수지 건너편 양지바른 곳에 모셔다 두었다. 군민들이 힘을 합쳐 그분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 선양사업을 이어나가는 것이었다. 전국 산재묘소를 돌아다니며 지켜본 것은 이곳 횡성은 다른 지방에 비하여 묘소 관리가 매우 잘 되어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놀라운 것은 중앙정부와 도에서는 예산과 정책의 문제로 사실상 진행되지 않았던 부분이 군과 읍에 있는 사람들이 힘을 합쳐 묘소를 이장하고 관리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인상 깊었다. 특히 전국에 있는 이런 산재묘소에 속하는 군과 읍에 좋은 선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점은 시사점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는 없다 또한, 독립운동의 다양한 방략 중에서 주막을 이용해 독립운동가들의 거점 및 피신처의 기능을 제공한 점은,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애국을 실천했다는 점에서 매우 높이 살 일이라 판단된다.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천하다고 할 수 있는 직업군에 속한 기생, 백정, 노비, 주모, 이러한 사회적 위치에 있던 사람들의 독립운동은 지금까지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우리가 잘 아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들의 옆에는 숨겨진 조력자들이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당연히 그들 혼자서 거사를 진행할 수도 없으며, 그들을 도운 사람들이 있었는데 왜 우리는 지금까지 그 조력자들은 누구였으며 그들은 왜 도왔는지 고민해보지 않았을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는 없다 1919년 3.1 만세운동과 횡성지역에서 발생한 4.1만세운동 당시 김순이 선생은 41세였다. (1878년 10월 15일생 ) 그렇다면 1900년 초와 1913부터 1918까지 발발한 1차세계대전 당시 김순이 선생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는 그런 것이 궁금해졌다. 안타깝게도 이 궁금함에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단지, 독립운동에 그렇게까지 가담했던 인물이라면 의병들이 구국운동을 펼치던 시절 선생의 나이는 20대 후반, 30대 초반이었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숨겨진 ‘의병’은 아니였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최근 미스터션샤인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었다. 그 드라마를 본 사람이라면 의병으로 활동했던 주모 한 명을 기억할 것이다. 나는 그 부분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다. 무엇이 당연하냐면 임시정부 요원들과 비밀리에 회동을 나눈 비밀거점은 가장 최하층, 서민들이 즐겨 먹던 국밥집, 설렁탕 집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훗날 그 장소를 ‘연통제’라고 불렀다. 김순이 선생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신이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운영하던 주막을 독립운동가들을 위한 횡성지역의 ‘연통제’로 사용한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는 없다 그 시대에는 그 누구도 자신의 독립운동 기록을 남기려 하지 않았고 주변에도 언급하지 않았다. 혹여나 그것이 문제가 되어 자신의 주변 사람들마저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으므로 그것은 당연한 불문율이었다. 더욱이 당시 노비, 기생, 백정, 주모와 같은 사회적 위치가 낮은 자들은 자신의 이름조차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그들의 투쟁의 역사는 더더욱 기록으로 보존되기 어려웠다. 독립운동가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3.1 운동에 참여한 시위인원은 약 200여만 명이며, 7,509명이 사망, 15,850명이 부상, 45,306명이 체포되었으며, 헐리고 불탄 민가가 715호, 교회가 47개소, 학교가 2개소였다고 말하고 있다. 3.1운동이 1919년에 발생했고 광복이 1945년인 것을 감안하면 이 숫자는 오히려 더 늘어날 것이다. 당시 전체 인구수를 고려해본다면 아주 특별한 결론을 얻어 낼 수 있다. 우리나라 국민 4명, 5명 중 1명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즉 이것은 특별한 사람들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의 몸부림이었고 노력의 산물이었다는 것이다. 김순이 선생은 남편 박영화씨와 결혼하여 슬하에 아들 박치욱, 딸 박덕원을 낳았다. 오랜 시간 아들에 대한 행방만 기록되었기에 후손이 단절되었다고 기록들은 전했지만, 박순업 횡성문화원장님이 오랜 시간 수소문 끝에 친딸이 있었고 13살에 시집을 가 현재 외 증손자분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횡성읍 옥동리와 갑천면 구방리의 중간 경계지점에서 조금 횡성 쪽에 위치한 곳에 주막이 운영되었다고 했다. 나는 이 장소를 직접 찾아가 보았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는 없다 현재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자그마한 텃밭이 존재하는 이곳이 바로 횡성지역의 ‘연통제’였다는 생각이들자 알 수 없는 감정에 가슴이 먹먹해지기 시작했다. 만약, 이분이 독립운동가로 서훈만 받을 수 있었어도, 혹은 방송매체를 통해 세상에 조금만 더 알려졌어도 과연 생가와 같은 이 기념비적인 장소가 이렇게 방치되고 심지어 이곳이 어떤 곳인지 설명해주는 최소한의 표지판도 없이 내버려 질지 참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는 없다 생전 선생을 직접 본 마을 유지분을 인터뷰를 진행했다. 아주 기골이 장대했어요. 딱 봐도 덩치도 크고 무서웠어요. 저 할머니 무서운 할머니다. 옛날에 일본 순사도 밀쳐냈던 사람이다. 그런 말들이 많았어요. 당시 일본 순사들은 정말 무서웠거든요. 주막을 운영하며 벌은 돈으로 김순이 선생은 공명단 단장이었던 독립운동가 최양옥 선생의 독립운동을 도왔고, 독립자금 모금에 협력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3.1운동 당시 주막을 독립운동가들의 모의장소로 제공했고, 4월 1일 횡성 장날 독립만세사건때 일경에 쫓겨 주막에 숨어 든 동지들을 규합하여 진두지휘하다 투옥(수감기록이없음, 목격자분들이 투옥이라고 표현한 점을 고려해보면 일경에 끌려갔으나 재판이 이루어지지않고 헌병 특권인 즉결심판권으로 태형과 같은 고문형을 받고 풀려난 것으로 추정)되는 등 횡성 3.1운동을 성취시킨 여성독립운동가이다. 선생은 1952년 12월 19일 남북전쟁당시 생을 마감하셨다. 독립운동과 관련된 직접적인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국가보훈처로부터 서훈을 받지 못했고 여전히 독립운동가로 지정이 되어있지않다. 이러한 점을 안타깝게 여겨 군과 읍에있는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후원의연금을 모아 갑천면 구방2리 공동묘지 산32에 봉분도 없이 흔적만 남아있는 곳에 묻혀있던 선생의 묘소를 이장해 애국지사 묘비를 세웠다. 내년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현 횡성지역 군수는 ”주민들에 애국의 고장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 황소아줌마 동상을 건립할 생각“이라고 전했다. 숨겨진 후손, 마을 주민들의 인터뷰를 통해 소수의 의로운 사람들이 이 분을 기억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공동묘지에 이름 없이 묻혀있던 선생의 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 단절되어 후손이 없다는 말에 포기하지 않고 실태조사를 했던 사람들, 후손분들이 돌아가시기 전 생전 마지막 사진을 남기고 그들의 기억을 책으로 남긴 사람들이 있었다. 기자의소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국민들게 알리는, 이것 뿐이어서 마음이 아프다. [필진 정상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원태우지사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원태우지사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기자의소리 "나는 오늘 이토의 정수리를 노린다" 원태우 지사 1905년은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비운의 해이다. 민족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는 11월 17일 조약 체결을 한 후 5일후인 22일 일본측 조약담당자였던 하야시 곤스케 공사를 대동하고 수원에서 사냥을 한 후 안양을 거쳐 서울로 가는 열차를 타고 오후 6시15분께 서리재고개(현재 안양육교)를 지나가게 되었다. 이를 항일운동에 불타던 한 열혈 청년이 알게됐다. 그는 1882년 3월 4일 안양시 안양1동 642에서 태어나 당시 23세이던 원태우 지사로 그는 당시 동네 청년들과 함께 현재의 관악 전철역에서 서울방면으로 약 400m지점인 안양육교 아래 철로변에 돌을 깔고 열차가 전복되기를 기다렸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기자의소리 그런데 갑자기 두려움에 떨던 일행중 한명이 돌을 치우자 곧 이어 열차가 나타났는데, 원 지사는 혼자 이토 히로부미가 앉은 자리를 향해 사방세치 크기의 돌맹이 수개를 던지자 유리창이 박살나며 여덟개의 파편이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 여덟군데에 박히는 자상을 입혔고 이토의 일행은 놀라서 상처를 응급처치하는 등 한 시간 이상 열차가 멈춰서게 되었다고 한다. 그럼 원 지사는 어떻게 달리는 기차 그것도 열차안에 찬 이토를 향해 정확하게 돌멩이를 던질 수 있었을까? 1905년 당시 기차 속도는 시속 20km~30km로 속도가 느렸으며 돌팔매질을 한 장소는 당시 서릿재 고개라 부르던 곳으로 경사가 급하여 열차는 속도를 줄이며 넘어가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 이야기로 서행을 해야만 하였다는 곳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기자의소리 또 고개를 깍아 기찻길을 놓았기에 비탈진 위쪽에서 아래쪽을 느리게 지나가는 기차 내부를 보기가 쉬운 점도 한 몫 하지 않았을까 싶다. 여기에 아시 장사라 불리우던 원 지사의 돌팔매질 실력과 천운을 더해서. 이토에 대한 피격 사건이 전보를 통해 일본에 알려지자 일본의 증시가 한때 일시 폭락하고 일본의 언론에도 보도되면서 일본열도를 한바탕 흔들어 놓았다고 한다. 또 사건 발생 이틀후에는 국내에도 알려지자 고종은 사좌서신을 보내고 사건 책임을 물어 시흥군수를 파면하고 경기 관찰사를 견책 처분하였다고 한다. 특히 이 사건 이후 전국에서 본격적인 항일운동이 시작되었고, 이후 적극적인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사건 직후 원태우 지사는 자리를 피하였으나 안양역의 철도 노무자로 있던 야마사키의 제보에 의하여 일본 헌병들에게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된다. 이후 동료들은 거사를 결행 시 두려움으로 현장을 이탈하여 무혐의로 석방되고 단독으로 거사를 일으킨 원태우 의사만 재판이 진행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조선의 민중 봉기 등으로 확대될까 하여 자신을 공격한 원태우 의사의 처벌 수위를 낮추도록 지시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기자의소리 이에 원 지사는 징역 2개월에 곤장 1백 대를 맞고 이듬 해 1월 24일에 석방되었다. 하지만 일본 헌병들의 악의적인 고문으로 인하여 평생 고통에 시달렸으며 온몸에 흉칙한 흉터 때문에 한 여름에도 긴 옷을 입고 다녔을 뿐만 아니라 국부에까지 심한 고문을 당해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했다. 만년에는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 수푸루지(임곡동)에서 불우하게 살다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69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정부는 원태우 지사의 의거 결행 85주년이자 원 지사 서거 40년만인 지난 1990년 8월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원태우 지사의 기록은 대한매일신보와 김윤식의 속음청사, 송상도의 기려수필에 기록되어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기자의소리 이후 일본인 화가 기무라 고타로가 ‘어리석은 조선인의 폭행’이라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 그림이 뒤늦게 한 한국인에 의하여 일본에서 발견되어 원태우 지사의 의거를 뒷받침하고 있다. 원태우 지사의 유품으로는 생존시 만든 돌절구 2개와 맷돌 1개가 있는데, 그중 맷돌 한 개는 1990년 독립기념관에 기증되었으며 나머지는 안양시청 별관 민원실 현관 한쪽에 전시돼 있다. 또 안양역 광장에서 2층 대합실로 올라가는 계단 벽면에는 조형물, 평촌 자유공원에는 동상, 그가 돌멩이를 던졌던 자리에는 의거지 표지석이 설치돼 있다. 참고자료: 진홍빛 별자국, 원태우: 기자의소리 글/사이채, 삽화:임한영, 안양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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