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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언 선생 – 3.1혁명 참가자로서 가장 높은 형량, 징역 15년을 선고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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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언 선생 – 3.1혁명 참가자로서 가장 높은 형량, 징역 15년을 선고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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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혁명여성동맹창립총회 기념사진 ⓒ국가보훈처

 

대동군 반석면 원장리 3.1혁명을 이끈 여성 독립운동가

 

종로 탑골공원 (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은 3일만에 북쪽 평안남도 대동 사천장터까지 퍼졌다.

 

1919년 3월 4일 양희언 선생은 사천장터 방면으로 행진하며 약 3천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일본군 시위대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비무장 군중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선생은 이에 굴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무력으로 3.1혁명에 나선 민중들을 탄압하는 주재소 순사를 처단하는데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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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 시위 주도자로 검거됐다가 석방된 당일 저녁 선생은 다시 군중을 모아 만세운동을 계속했으며 다시 한번 일경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선생은 3.1혁명 참가자로서는 가장 높은 형량인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룬다.

    

조선총독부가 당시 선생에게 내린 죄명 : 살인, 방화, 소요, 보안법 위반. 소요는 오늘날 시위와 같은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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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선생의 나이 26세. 징역 15년 선고가 떨어지던 재판장에서 양희언 선생은 외쳤다.

 

"만세는 죄가 되지 않는다!!"

 

당시 판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세를 불러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논하는 점은 피고 한 개의 의견에 불과하므로 채용할 수 없다. 논지는 이유 없다.”

 

논지는 이유 없다…? 이것이 정말 재판관이 할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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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언 선생이 징역 15년을 받았다는 내용이 기술된 ‘신분장지문원지’ ⓒ국가보훈처

 

양희언 선생의 활동은 3.1혁명 당시 주재소와 면사무소 등 일제 말단 식민통치 기관에 대한 주민들의 저항의식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준다. 선생에 대한 자료는 1919년 발행된 <신분장지문원지>와 1919년 12월 5일 발행된 <매일신보>에서 찾을 수 있었다. 신분장지문원지는 일제강점기 감옥에 투옥된 인물들의 인적사항, 형량 등을 기재하고 지문을 첨부한 기록이다.

 

이것은 정말 귀중한 사료다. 이 문서에 아래에 보면 정확히 1919년 11월 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3.1운동과 관련해 징역 15년을 받았으며, 8년이 지난 1927년 9월 3일 가출옥 석방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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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1919년 3월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돼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던 양희언 선생에게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국가보훈처

 

2017년 국가보훈처에 해당 원문 내용이 밝혀졌고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매일신보(1919. 12. 5) - 사천 헌병 살해 상보/ 1919년 3월 3일에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야소교 목사 송현근은/ 김병주외 2명과 공모 하고/ 사천시장에서 독립운동을 고취한 일로 인하여 사천헌병주재소에 검거되었더니/ 그날 저녁때에 석방하였으나/ 김병주외 2명은 오히려 검속하였음으로/ 다시 독립운동을 계속하여/ 많은 군중의 시위 운동으로써/ 검속 당한 사람을 뺏어가려고/ 그날 밤 9시 경에 군중을 모아가지고/ 그 주재소 서쪽 십자가 부근에 와서/ 만세를 잇달아 부르고/ 불온한 행동을 한 고로/ 동 소장 헌병상등병 좌등실오랑(佐藤實五郞) 은 보조원과 같이 헛총을 놓으며/ 군중을 해산케 하는 동시에/ (중략) 두어 번이나 총 을 놓았더니/ 군중은 더욱 격앙하여/ (중략) 이준배, 양희언(梁希彦),차병규 등은 다시 다른 군중을 데리고/ 김 박 두 보조원을 쫓아가서/ (중략) 달아나는 것을 보고/ 군중은 다시 그들을 쫓아가서/ 이규승 외 수명은 김 보조원을 죽이라고/ 그 동리 동북방의 고지에 쫓아가서 때리고 차서 죽이고/ (하략)

 

안타깝게도 선생이 정확히 언제 어디서 돌아가셨는지 기록을 찾기 힘들다. 다만 대부분의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후방지원을 할 때 일종의 무력투쟁(의열투쟁)에 앞장 선 여성독립운동가라는 점이 매우 놀라웠다. 이제야 기자의소리에 올린다는 것이 부끄럽다.

 

이번 기회를 통해 우리 대한민국의 후손들이 3.1혁명에 앞장서서 무력투쟁에 참여했던 양희언 여성독립운동가를 기억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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