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25 (토)

  • 구름많음속초1.3℃
  • 흐림-0.4℃
  • 흐림철원-3.9℃
  • 흐림동두천-3.5℃
  • 흐림파주-1.5℃
  • 구름많음대관령-2.0℃
  • 구름많음백령도2.1℃
  • 구름많음북강릉2.0℃
  • 구름많음강릉2.6℃
  • 흐림동해3.2℃
  • 연무서울1.3℃
  • 연무인천0.0℃
  • 구름많음원주-0.8℃
  • 구름많음울릉도2.9℃
  • 박무수원-1.7℃
  • 구름많음영월-1.2℃
  • 흐림충주-2.5℃
  • 흐림서산1.0℃
  • 흐림울진4.4℃
  • 박무청주0.6℃
  • 박무대전0.5℃
  • 구름많음추풍령4.0℃
  • 구름많음안동3.3℃
  • 흐림상주4.3℃
  • 비포항7.9℃
  • 흐림군산1.0℃
  • 구름많음대구5.7℃
  • 연무전주1.8℃
  • 흐림울산7.7℃
  • 흐림창원6.0℃
  • 박무광주4.2℃
  • 흐림부산8.8℃
  • 흐림통영8.1℃
  • 박무목포3.1℃
  • 흐림여수8.3℃
  • 흐림흑산도6.0℃
  • 흐림완도7.0℃
  • 흐림고창1.3℃
  • 흐림순천1.6℃
  • 박무홍성(예)-2.2℃
  • 흐림제주12.0℃
  • 흐림고산11.3℃
  • 흐림성산12.5℃
  • 흐림서귀포12.6℃
  • 흐림진주2.7℃
  • 흐림강화-2.5℃
  • 흐림양평-0.6℃
  • 흐림이천-1.4℃
  • 흐림인제-1.0℃
  • 흐림홍천-2.2℃
  • 구름많음태백1.0℃
  • 흐림정선군-1.0℃
  • 구름많음제천-2.6℃
  • 구름많음보은-0.2℃
  • 구름많음천안-2.6℃
  • 흐림보령-0.3℃
  • 흐림부여-0.7℃
  • 흐림금산-1.5℃
  • 흐림부안0.5℃
  • 흐림임실-1.3℃
  • 흐림정읍0.6℃
  • 흐림남원1.7℃
  • 흐림장수-1.5℃
  • 흐림고창군0.8℃
  • 흐림영광군2.0℃
  • 흐림김해시8.1℃
  • 흐림순창군0.2℃
  • 흐림북창원6.3℃
  • 흐림양산시8.4℃
  • 흐림보성군6.2℃
  • 흐림강진군4.2℃
  • 흐림장흥3.6℃
  • 흐림해남1.9℃
  • 흐림고흥7.0℃
  • 흐림의령군4.8℃
  • 흐림함양군3.2℃
  • 흐림광양시8.1℃
  • 흐림진도군5.0℃
  • 흐림봉화1.7℃
  • 흐림영주3.2℃
  • 흐림문경4.8℃
  • 구름많음청송군2.3℃
  • 흐림영덕4.9℃
  • 흐림의성3.3℃
  • 구름많음구미3.2℃
  • 구름많음영천3.5℃
  • 흐림경주시5.9℃
  • 흐림거창1.5℃
  • 구름많음합천2.7℃
  • 흐림밀양4.3℃
  • 흐림산청3.1℃
  • 흐림거제8.8℃
  • 흐림남해6.2℃
기상청 제공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원태우지사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신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원태우지사

 

그림06.jpg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기자의소리

 

"나는 오늘 이토의 정수리를 노린다"

 

원태우 지사 1905년은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비운의 해이다. 민족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는 11월 17일 조약 체결을 한 후 5일후인 22일 일본측 조약담당자였던 하야시 곤스케 공사를 대동하고 수원에서 사냥을 한 후 안양을 거쳐 서울로 가는 열차를 타고 오후 6시15분께 서리재고개(현재 안양육교)를 지나가게 되었다.

 

그림15.jpg

 

이를 항일운동에 불타던 한 열혈 청년이 알게됐다. 그는 1882년 3월 4일 안양시 안양1동 642에서 태어나 당시 23세이던 원태우 지사로 그는 당시 동네 청년들과 함께 현재의 관악 전철역에서 서울방면으로 약 400m지점인 안양육교 아래 철로변에 돌을 깔고 열차가 전복되기를 기다렸다.

 

그림08.jpg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기자의소리

 

그런데 갑자기 두려움에 떨던 일행중 한명이 돌을 치우자 곧 이어 열차가 나타났는데, 원 지사는 혼자 이토 히로부미가 앉은 자리를 향해 사방세치 크기의 돌맹이 수개를 던지자 유리창이 박살나며 여덟개의 파편이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 여덟군데에 박히는 자상을 입혔고 이토의 일행은 놀라서 상처를 응급처치하는 등 한 시간 이상 열차가 멈춰서게 되었다고 한다.

 

그럼 원 지사는 어떻게 달리는 기차 그것도 열차안에 찬 이토를 향해 정확하게 돌멩이를 던질 수 있었을까? 1905년 당시 기차 속도는 시속 20km~30km로 속도가 느렸으며 돌팔매질을 한 장소는 당시 서릿재 고개라 부르던 곳으로 경사가 급하여 열차는 속도를 줄이며 넘어가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 이야기로 서행을 해야만 하였다는 곳이다.

 

그림09.jpg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기자의소리

 

또 고개를 깍아 기찻길을 놓았기에 비탈진 위쪽에서 아래쪽을 느리게 지나가는 기차 내부를 보기가 쉬운 점도 한 몫 하지 않았을까 싶다. 여기에 아시 장사라 불리우던 원 지사의 돌팔매질 실력과 천운을 더해서. 이토에 대한 피격 사건이 전보를 통해 일본에 알려지자 일본의 증시가 한때 일시 폭락하고 일본의 언론에도 보도되면서 일본열도를 한바탕 흔들어 놓았다고 한다.

 

또 사건 발생 이틀후에는 국내에도 알려지자 고종은 사좌서신을 보내고 사건 책임을 물어 시흥군수를 파면하고 경기 관찰사를 견책 처분하였다고 한다. 특히 이 사건 이후 전국에서 본격적인 항일운동이 시작되었고, 이후 적극적인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사건 직후 원태우 지사는 자리를 피하였으나 안양역의 철도 노무자로 있던 야마사키의 제보에 의하여 일본 헌병들에게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된다.

 

IMG_20190821_5.jpg

 

이후 동료들은 거사를 결행 시 두려움으로 현장을 이탈하여 무혐의로 석방되고 단독으로 거사를 일으킨 원태우 의사만 재판이 진행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조선의 민중 봉기 등으로 확대될까 하여 자신을 공격한 원태우 의사의 처벌 수위를 낮추도록 지시한다.

 

2019082601054312_20190826164503879.jpg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기자의소리

 
 

이에 원 지사는 징역 2개월에 곤장 1백 대를 맞고 이듬 해 1월 24일에 석방되었다. 하지만 일본 헌병들의 악의적인 고문으로 인하여 평생 고통에 시달렸으며 온몸에 흉칙한 흉터 때문에 한 여름에도 긴 옷을 입고 다녔을 뿐만 아니라 국부에까지 심한 고문을 당해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했다. 만년에는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 수푸루지(임곡동)에서 불우하게 살다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69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정부는 원태우 지사의 의거 결행 85주년이자 원 지사 서거 40년만인 지난 1990년 8월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원태우 지사의 기록은 대한매일신보와 김윤식의 <속음청사>, 송상도의 <기려수필>에 기록되어 있다.

 

그림10.jpg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기자의소리

 
 

이후 일본인 화가 기무라 고타로가 ‘어리석은 조선인의 폭행’이라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 그림이 뒤늦게 한 한국인에 의하여 일본에서 발견되어 원태우 지사의 의거를 뒷받침하고 있다. 원태우 지사의 유품으로는 생존시 만든 돌절구 2개와 맷돌 1개가 있는데, 그중 맷돌 한 개는 1990년 독립기념관에 기증되었으며 나머지는 안양시청 별관 민원실 현관 한쪽에 전시돼 있다. 또 안양역 광장에서 2층 대합실로 올라가는 계단 벽면에는 조형물, 평촌 자유공원에는 동상, 그가 돌멩이를 던졌던 자리에는 의거지 표지석이 설치돼 있다.

 

참고자료: <진홍빛 별자국, 원태우: 기자의소리 글/사이채, 삽화:임한영, 안양시민신문>

 

IMG_20190731_1.jpg




340055043358427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