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주막을 ‘연통제’로 ''독립운동가 김순이 선생''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는 없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헌병은 즉결심판권이 있었다. 태형같은 형벌은 법 재판이 이루어지지 않고 바로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수감기록이나 형무소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바로 이러한 부분 때문에 수많은 독립운동가 분들이 독립운동에 가담하였음에도 그것이 기록으로 남지 않아 현재 서훈을 받지 못하는 예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국가보훈처 법령에는 뚜렷한 공적이 있어야 서훈이 지정 가능하다는 문구가 있다. 그로 인해 뚜렷한 공적에 해당하는 수감기록 혹은 당시 신문 및 기타 매체에 언급이 되어야 그 증거자료로 서훈 자격요건이 해당한다. 현재 횡성군에서는 김순이 여사에 대하여 공동묘지에서 묘소를 이장하여 갑천면에 있는 한치 저수지 건너편 양지바른 곳에 모셔다 두었다. 군민들이 힘을 합쳐 그분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 선양사업을 이어나가는 것이었다. 전국 산재묘소를 돌아다니며 지켜본 것은 이곳 횡성은 다른 지방에 비하여 묘소 관리가 매우 잘 되어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놀라운 것은 중앙정부와 도에서는 예산과 정책의 문제로 사실상 진행되지 않았던 부분이 군과 읍에 있는 사람들이 힘을 합쳐 묘소를 이장하고 관리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인상 깊었다. 특히 전국에 있는 이런 산재묘소에 속하는 군과 읍에 좋은 선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점은 시사점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는 없다 또한, 독립운동의 다양한 방략 중에서 주막을 이용해 독립운동가들의 거점 및 피신처의 기능을 제공한 점은,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애국을 실천했다는 점에서 매우 높이 살 일이라 판단된다.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천하다고 할 수 있는 직업군에 속한 기생, 백정, 노비, 주모, 이러한 사회적 위치에 있던 사람들의 독립운동은 지금까지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우리가 잘 아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들의 옆에는 숨겨진 조력자들이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당연히 그들 혼자서 거사를 진행할 수도 없으며, 그들을 도운 사람들이 있었는데 왜 우리는 지금까지 그 조력자들은 누구였으며 그들은 왜 도왔는지 고민해보지 않았을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는 없다 1919년 3.1 만세운동과 횡성지역에서 발생한 4.1만세운동 당시 김순이 선생은 41세였다. (1878년 10월 15일생 ) 그렇다면 1900년 초와 1913부터 1918까지 발발한 1차세계대전 당시 김순이 선생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는 그런 것이 궁금해졌다. 안타깝게도 이 궁금함에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단지, 독립운동에 그렇게까지 가담했던 인물이라면 의병들이 구국운동을 펼치던 시절 선생의 나이는 20대 후반, 30대 초반이었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숨겨진 ‘의병’은 아니였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최근 <미스터션샤인>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었다. 그 드라마를 본 사람이라면 의병으로 활동했던 주모 한 명을 기억할 것이다. 나는 그 부분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다. 무엇이 당연하냐면 임시정부 요원들과 비밀리에 회동을 나눈 비밀거점은 가장 최하층, 서민들이 즐겨 먹던 국밥집, 설렁탕 집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훗날 그 장소를 ‘연통제’라고 불렀다. 김순이 선생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신이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운영하던 주막을 독립운동가들을 위한 횡성지역의 ‘연통제’로 사용한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는 없다 그 시대에는 그 누구도 자신의 독립운동 기록을 남기려 하지 않았고 주변에도 언급하지 않았다. 혹여나 그것이 문제가 되어 자신의 주변 사람들마저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으므로 그것은 당연한 불문율이었다. 더욱이 당시 노비, 기생, 백정, 주모와 같은 사회적 위치가 낮은 자들은 자신의 이름조차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그들의 투쟁의 역사는 더더욱 기록으로 보존되기 어려웠다. 독립운동가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3.1 운동에 참여한 시위인원은 약 200여만 명이며, 7,509명이 사망, 15,850명이 부상, 45,306명이 체포되었으며, 헐리고 불탄 민가가 715호, 교회가 47개소, 학교가 2개소였다고 말하고 있다. 3.1운동이 1919년에 발생했고 광복이 1945년인 것을 감안하면 이 숫자는 오히려 더 늘어날 것이다. 당시 전체 인구수를 고려해본다면 아주 특별한 결론을 얻어 낼 수 있다. 우리나라 국민 4명, 5명 중 1명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즉 이것은 특별한 사람들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의 몸부림이었고 노력의 산물이었다는 것이다. 김순이 선생은 남편 박영화씨와 결혼하여 슬하에 아들 박치욱, 딸 박덕원을 낳았다. 오랜 시간 아들에 대한 행방만 기록되었기에 후손이 단절되었다고 기록들은 전했지만, 박순업 횡성문화원장님이 오랜 시간 수소문 끝에 친딸이 있었고 13살에 시집을 가 현재 외 증손자분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횡성읍 옥동리와 갑천면 구방리의 중간 경계지점에서 조금 횡성 쪽에 위치한 곳에 주막이 운영되었다고 했다. 나는 이 장소를 직접 찾아가 보았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는 없다 현재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자그마한 텃밭이 존재하는 이곳이 바로 횡성지역의 ‘연통제’였다는 생각이들자 알 수 없는 감정에 가슴이 먹먹해지기 시작했다. 만약, 이분이 독립운동가로 서훈만 받을 수 있었어도, 혹은 방송매체를 통해 세상에 조금만 더 알려졌어도 과연 생가와 같은 이 기념비적인 장소가 이렇게 방치되고 심지어 이곳이 어떤 곳인지 설명해주는 최소한의 표지판도 없이 내버려 질지 참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는 없다 생전 선생을 직접 본 마을 유지분을 인터뷰를 진행했다. 아주 기골이 장대했어요. 딱 봐도 덩치도 크고 무서웠어요. 저 할머니 무서운 할머니다. 옛날에 일본 순사도 밀쳐냈던 사람이다. 그런 말들이 많았어요. 당시 일본 순사들은 정말 무서웠거든요. 주막을 운영하며 벌은 돈으로 김순이 선생은 공명단 단장이었던 독립운동가 최양옥 선생의 독립운동을 도왔고, 독립자금 모금에 협력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3.1운동 당시 주막을 독립운동가들의 모의장소로 제공했고, 4월 1일 횡성 장날 독립만세사건때 일경에 쫓겨 주막에 숨어 든 동지들을 규합하여 진두지휘하다 투옥(수감기록이없음, 목격자분들이 투옥이라고 표현한 점을 고려해보면 일경에 끌려갔으나 재판이 이루어지지않고 헌병 특권인 즉결심판권으로 태형과 같은 고문형을 받고 풀려난 것으로 추정)되는 등 횡성 3.1운동을 성취시킨 여성독립운동가이다. 선생은 1952년 12월 19일 남북전쟁당시 생을 마감하셨다. 독립운동과 관련된 직접적인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국가보훈처로부터 서훈을 받지 못했고 여전히 독립운동가로 지정이 되어있지않다. 이러한 점을 안타깝게 여겨 군과 읍에있는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후원의연금을 모아 갑천면 구방2리 공동묘지 산32에 봉분도 없이 흔적만 남아있는 곳에 묻혀있던 선생의 묘소를 이장해 애국지사 묘비를 세웠다. 내년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현 횡성지역 군수는 ”주민들에 애국의 고장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 황소아줌마 동상을 건립할 생각“이라고 전했다. 숨겨진 후손, 마을 주민들의 인터뷰를 통해 소수의 의로운 사람들이 이 분을 기억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공동묘지에 이름 없이 묻혀있던 선생의 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 단절되어 후손이 없다는 말에 포기하지 않고 실태조사를 했던 사람들, 후손분들이 돌아가시기 전 생전 마지막 사진을 남기고 그들의 기억을 책으로 남긴 사람들이 있었다. 기자의소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국민들게 알리는, 이것 뿐이어서 마음이 아프다. [필진 정상규]

  • 기자의소리 이선진기자
  • 2019년 09월 27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원태우지사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기자의소리 "나는 오늘 이토의 정수리를 노린다" 원태우 지사 1905년은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비운의 해이다. 민족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는 11월 17일 조약 체결을 한 후 5일후인 22일 일본측 조약담당자였던 하야시 곤스케 공사를 대동하고 수원에서 사냥을 한 후 안양을 거쳐 서울로 가는 열차를 타고 오후 6시15분께 서리재고개(현재 안양육교)를 지나가게 되었다. 이를 항일운동에 불타던 한 열혈 청년이 알게됐다. 그는 1882년 3월 4일 안양시 안양1동 642에서 태어나 당시 23세이던 원태우 지사로 그는 당시 동네 청년들과 함께 현재의 관악 전철역에서 서울방면으로 약 400m지점인 안양육교 아래 철로변에 돌을 깔고 열차가 전복되기를 기다렸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기자의소리 그런데 갑자기 두려움에 떨던 일행중 한명이 돌을 치우자 곧 이어 열차가 나타났는데, 원 지사는 혼자 이토 히로부미가 앉은 자리를 향해 사방세치 크기의 돌맹이 수개를 던지자 유리창이 박살나며 여덟개의 파편이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 여덟군데에 박히는 자상을 입혔고 이토의 일행은 놀라서 상처를 응급처치하는 등 한 시간 이상 열차가 멈춰서게 되었다고 한다. 그럼 원 지사는 어떻게 달리는 기차 그것도 열차안에 찬 이토를 향해 정확하게 돌멩이를 던질 수 있었을까? 1905년 당시 기차 속도는 시속 20km~30km로 속도가 느렸으며 돌팔매질을 한 장소는 당시 서릿재 고개라 부르던 곳으로 경사가 급하여 열차는 속도를 줄이며 넘어가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 이야기로 서행을 해야만 하였다는 곳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기자의소리 또 고개를 깍아 기찻길을 놓았기에 비탈진 위쪽에서 아래쪽을 느리게 지나가는 기차 내부를 보기가 쉬운 점도 한 몫 하지 않았을까 싶다. 여기에 아시 장사라 불리우던 원 지사의 돌팔매질 실력과 천운을 더해서. 이토에 대한 피격 사건이 전보를 통해 일본에 알려지자 일본의 증시가 한때 일시 폭락하고 일본의 언론에도 보도되면서 일본열도를 한바탕 흔들어 놓았다고 한다. 또 사건 발생 이틀후에는 국내에도 알려지자 고종은 사좌서신을 보내고 사건 책임을 물어 시흥군수를 파면하고 경기 관찰사를 견책 처분하였다고 한다. 특히 이 사건 이후 전국에서 본격적인 항일운동이 시작되었고, 이후 적극적인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사건 직후 원태우 지사는 자리를 피하였으나 안양역의 철도 노무자로 있던 야마사키의 제보에 의하여 일본 헌병들에게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된다. 이후 동료들은 거사를 결행 시 두려움으로 현장을 이탈하여 무혐의로 석방되고 단독으로 거사를 일으킨 원태우 의사만 재판이 진행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조선의 민중 봉기 등으로 확대될까 하여 자신을 공격한 원태우 의사의 처벌 수위를 낮추도록 지시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기자의소리 이에 원 지사는 징역 2개월에 곤장 1백 대를 맞고 이듬 해 1월 24일에 석방되었다. 하지만 일본 헌병들의 악의적인 고문으로 인하여 평생 고통에 시달렸으며 온몸에 흉칙한 흉터 때문에 한 여름에도 긴 옷을 입고 다녔을 뿐만 아니라 국부에까지 심한 고문을 당해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했다. 만년에는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 수푸루지(임곡동)에서 불우하게 살다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69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정부는 원태우 지사의 의거 결행 85주년이자 원 지사 서거 40년만인 지난 1990년 8월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원태우 지사의 기록은 대한매일신보와 김윤식의 <속음청사>, 송상도의 <기려수필>에 기록되어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기자의소리 이후 일본인 화가 기무라 고타로가 ‘어리석은 조선인의 폭행’이라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 그림이 뒤늦게 한 한국인에 의하여 일본에서 발견되어 원태우 지사의 의거를 뒷받침하고 있다. 원태우 지사의 유품으로는 생존시 만든 돌절구 2개와 맷돌 1개가 있는데, 그중 맷돌 한 개는 1990년 독립기념관에 기증되었으며 나머지는 안양시청 별관 민원실 현관 한쪽에 전시돼 있다. 또 안양역 광장에서 2층 대합실로 올라가는 계단 벽면에는 조형물, 평촌 자유공원에는 동상, 그가 돌멩이를 던졌던 자리에는 의거지 표지석이 설치돼 있다. 참고자료: <진홍빛 별자국, 원태우: 기자의소리 글/사이채, 삽화:임한영, 안양시민신문>

  • 기자의소리
  • 2019년 09월 18일

양희언 선생 – 3.1혁명 참가자로서 가장 높은 형량, 징역 15년을 선고받다

한국혁명여성동맹창립총회 기념사진 ⓒ국가보훈처 대동군 반석면 원장리 3.1혁명을 이끈 여성 독립운동가 종로 탑골공원 (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은 3일만에 북쪽 평안남도 대동 사천장터까지 퍼졌다. 1919년 3월 4일 양희언 선생은 사천장터 방면으로 행진하며 약 3천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일본군 시위대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비무장 군중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선생은 이에 굴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무력으로 3.1혁명에 나선 민중들을 탄압하는 주재소 순사를 처단하는데 앞장섰다. 만세 시위 주도자로 검거됐다가 석방된 당일 저녁 선생은 다시 군중을 모아 만세운동을 계속했으며 다시 한번 일경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선생은 3.1혁명 참가자로서는 가장 높은 형량인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룬다. 조선총독부가 당시 선생에게 내린 죄명 : 살인, 방화, 소요, 보안법 위반. 소요는 오늘날 시위와 같은 의미다. 당시 선생의 나이 26세. 징역 15년 선고가 떨어지던 재판장에서 양희언 선생은 외쳤다. "만세는 죄가 되지 않는다!!" 당시 판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세를 불러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논하는 점은 피고 한 개의 의견에 불과하므로 채용할 수 없다. 논지는 이유 없다.” 논지는 이유 없다…? 이것이 정말 재판관이 할 말인가? 양희언 선생이 징역 15년을 받았다는 내용이 기술된 ‘신분장지문원지’ ⓒ국가보훈처 양희언 선생의 활동은 3.1혁명 당시 주재소와 면사무소 등 일제 말단 식민통치 기관에 대한 주민들의 저항의식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준다. 선생에 대한 자료는 1919년 발행된 <신분장지문원지>와 1919년 12월 5일 발행된 <매일신보>에서 찾을 수 있었다. 신분장지문원지는 일제강점기 감옥에 투옥된 인물들의 인적사항, 형량 등을 기재하고 지문을 첨부한 기록이다. 이것은 정말 귀중한 사료다. 이 문서에 아래에 보면 정확히 1919년 11월 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3.1운동과 관련해 징역 15년을 받았으며, 8년이 지난 1927년 9월 3일 가출옥 석방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여성독립운동가]1919년 3월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돼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던 양희언 선생에게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국가보훈처 2017년 국가보훈처에 해당 원문 내용이 밝혀졌고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매일신보(1919. 12. 5) - 사천 헌병 살해 상보/ 1919년 3월 3일에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야소교 목사 송현근은/ 김병주외 2명과 공모 하고/ 사천시장에서 독립운동을 고취한 일로 인하여 사천헌병주재소에 검거되었더니/ 그날 저녁때에 석방하였으나/ 김병주외 2명은 오히려 검속하였음으로/ 다시 독립운동을 계속하여/ 많은 군중의 시위 운동으로써/ 검속 당한 사람을 뺏어가려고/ 그날 밤 9시 경에 군중을 모아가지고/ 그 주재소 서쪽 십자가 부근에 와서/ 만세를 잇달아 부르고/ 불온한 행동을 한 고로/ 동 소장 헌병상등병 좌등실오랑(佐藤實五郞) 은 보조원과 같이 헛총을 놓으며/ 군중을 해산케 하는 동시에/ (중략) 두어 번이나 총 을 놓았더니/ 군중은 더욱 격앙하여/ (중략) 이준배, 양희언(梁希彦),차병규 등은 다시 다른 군중을 데리고/ 김 박 두 보조원을 쫓아가서/ (중략) 달아나는 것을 보고/ 군중은 다시 그들을 쫓아가서/ 이규승 외 수명은 김 보조원을 죽이라고/ 그 동리 동북방의 고지에 쫓아가서 때리고 차서 죽이고/ (하략) 안타깝게도 선생이 정확히 언제 어디서 돌아가셨는지 기록을 찾기 힘들다. 다만 대부분의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후방지원을 할 때 일종의 무력투쟁(의열투쟁)에 앞장 선 여성독립운동가라는 점이 매우 놀라웠다. 이제야 기자의소리에 올린다는 것이 부끄럽다. 이번 기회를 통해 우리 대한민국의 후손들이 3.1혁명에 앞장서서 무력투쟁에 참여했던 양희언 여성독립운동가를 기억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 기자의소리
  • 2019년 09월 05일

최재형선생 ''부와 명예를 다 버리고 마지막은 총살형으로''

안중근의사를 도운 최재형선생 ⓒ네이버 최재형 선생은 함경도 노비 출신으로 아버지도 노비였고 어머니는 기생인 천민이었다. 어린 나이에 러시아로 가족이 이주한 뒤 하급선원, 공장 일용직 노동자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다 고생 끝에 군수산업으로 큰돈을 벌게 된다. 이때 번 돈이 당시 러시아 노동자 임금의 만 배에 해당한다고 한다. 당시, 러시아에 도로와 학교를 짓는 공로를 인정받아 러시아 황제의 대관식에 참석해 예복을 하사받기도 했던 뒤늦게 빛을 발한 ‘대기만성형’ 자본가였던 최재형 선생, 그의 인생은 부를 얻은것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다음은 안중근 의사 자서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조사관: 그대는 의병이라고 말하는데 그 통할자는 누구인가? 안중근: 팔도의 총독은 ‘김두성’이라 부르며 강원도 사람이지만 지금의 거처는 모른다. 조사관: 그대의 직접 상관은 누구인가? 안중근: 김두성이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후 체포되어 공판을 받던 1909년 10월 26일, 처음으로 거론된 코드네임 ‘김두성’. 일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김두성을 찾으려 했으나 결코 발견하지 못했다. ‘김두성’이 누군가에 대해 사학자들의 논의가 다양하지만 가장 유력한 가능성은 ‘고종’ 황제와 ‘최재형’ 선생이다. 대체 최재형 선생은 누구이며 안중근 의사와 어떤 관계였던 것일까? 최재형 순국100주년추모위원회 ⓒ경향신문 간도에서 활동하던 이범윤 의병장이 자신의 의병들을 데리고 러시아의 부호 최재형 선생을 찾아온다. 그의 목적은 단 하나, 군자금을 지원해달라는 것이었다. 최재형 선생은 군자금을 지원하는 것 뿐만 아니라 숙식을 제공하며 당시 러시아에서 형성한 인맥을 활용하여 러시아 소총을 의병에서 공급하였다. 또한 러시아에 산재되어있던 의병들을 규합해 이범윤 의병장 부대에 통합시켰다. 든든한 군수물자 및 휴식지원을 받은 이범윤 의병장은 두만강 하류에 있던 일본 군대를 기습하여 모두 격파하였고 곧이어 국내로 진격하여 일본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 이전과 너무나 달라진 이범윤 의병부대의 모습에 필시 지원세력이 있다고 여긴 일제는 러시아 지역을 샅샅이 수색하였고 최재형 선생을 의심스러운 인물로 선정하게 된다.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최재형 선생은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그 결과 대동공보라는 러시아 주재 교민단체 신문을 지원하기 시작한다. 당시 대동공보는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와 독립정신의 중요성을 알리는 기사를 냈으나, 극심한 재정난에 휴간 중이었다. 최재형 선생은 매달마다 거금을 지원하며 신문사를 부활 시켰고 결국 대동공보 사장에 취임하게 된다. 이 대동공보 신문사의 기자가 바로 안중근 의사였다. 최재형선생 ⓒ네이버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방문할 것이라는 기사가 대동공보에 실리고 며칠 뒤, 안중근 의사는 최재형 선생을 독대한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 저격계획을 구체적으로 의논하였고 거사를 함께 진행했다. 당시 계획은 저격에서 그치는 수준이 아니라 전 세계가 주목할 것이기에 이 일을 통하여 전 세계를 향해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할지까지 의논했다고 한다. 당시 하얼빈은 러시아 관할지였고 국제법상 하얼빈 사건의 재판권은 러시아에 있었지만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일본의 재판권 요구에 따른다. 이로 인해 최재형 선생이 선임했던 변호사를 포함 소송 계획은 어그러졌고 동지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괴로움에 선생은 배우자 김아려와 자녀 안문생(장남), 안준생(차남)을 보호하기 시작한다. 러시아의 항일운동, 신한촌(블라디보스토크)을 거점으로 이루어졌던 독립운동에서 군수지원과 군자금 지원의 중심적인 인물이었던 선생은 1920년 4월 5일 긴급 체포되어 재판도 없고 취조도 없이 2틀 후인 4월 7일 총살당했다. 일제는 1920년 4월 4일 러시아의 ‘붉은군대’를 습격하고 군인들을 무장해제 시켰던 ‘4월 연해주 참변’을 일으켰고 이를 빌미로 독립운동가들을 붙잡아 재판도 없이 살해했다. 러시아에서 명예와 부를 누리며 편안히 살 수 있었던 최재형 선생.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실천하였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선생이 보여준 그 민족정신을 우리 후손들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기자의소리
  • 2019년 08월 30일

제2의 안중근, 이춘상 독립투사

소록도 ⓒ네이버 전라남도 고흥에 있는 어린 사슴을 닮은 한 섬. 1915년 일제 강점기 한센병 환자들을 강제로 수용시켰던 곳이다. 6000명이나 되는 인원이 모여 있던 이곳은 한센병 환자들의 고통과 한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그들은 한센병 환자라는 이유 하나로, 가혹한 학대, 강제 노역 동원, 생체 실험, 정관 수술과 불임 수술, 가족의 동의 없는 시체 해부 등 온갖 종류의 인권 유린이 펼쳐졌다. 스호마시카 ⓒ네이버 소록도 4대 원장으로 부임한 ‘스호 마사키’는 소록도를 세계 최고의 한센병 요양시설로 만들겠다는 욕심에서 환자들을 노예처럼 부렸다. 또한 전시 군수 물자 조달을 위해서 환자들에게 혹독한 노동을 강요했고, 당시 실상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지금 소록도에서는 성한 소나무를 찾아보기 힘들다. 일제시대 소나무에서 추출된 송진은 송탄유라는 이름으로 항공기에 사용됐다. 설상가상 전시체제하에서 줄어든 식량 배급에서 비롯된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도망치는 환자들이 생겼고, 붙잡힌 사람들은 혹독한 고문으로 불구가 되거나 죽어갔다. 강제로 자식을 낳지 못하도록 단종 수술을 받는 고통을 당하는 등 기본적인 인권마저 유린된 상황에서 자살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단종이란 생식 능력을 없애는 일을 말한다. 이춘상은 14세 때 한센병이 발병하고 대구에서 2년 동안 치료를 받고 퇴원했다. 그 후 만주로 건너가 마적 생활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만주에서 돌아온 이춘상은 소록도로 수용되었고 당시 한센인들을 향한 온갖 만행을 지켜보며 스호 마사키 원장을 살해 할 계획을 세웠다. 거사일 1942년 6월 20일. 스호 마사키 원장은 매달 20일 자신의 동상을 향해 수천명의 한센병 환자들이 참배를 하는 시간을 만들어 운영했고 (이것을 ‘정례보은감사일’ 이라고 불렀다) 그 날 거사를 진행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차 문이 열리고 스호 마사키 원장이 내렸고, 기다렸다는 듯이 이춘상은 스호 마사키를 향해 돌진하며 그의 심장에 식칼을 깊이 찔렀다. 대구 형무소에 수감된 뒤 재판 과정에서 이춘상은 “고통 받고 있는 환우들의 원한을 풀어 주기 위해서 그리고 육지에 사는 일반인들에게 소록도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알리기 위해서 스호 마사키를 처단했다”고 증언했다. 재판부는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고, 1943년 2월 19일 오후 2시, 당시 27살의 나이로 이춘상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당시 조선 제 1의 흉악범이 안중근이라면, 제2의 흉악범은 이춘상이다 라고 일본 신문은 전했는데, 결국 이춘상은 인권사각지대였던 소록도의 실상을 폭로하고, 환자들에 대한 만행을 중지하라고 강력하게 경고한 것이다. 즉 정의를 위하여 일으킨 의로운 거사, 의거(義擧)다. 하지만 나환자의 아버지로까지 미화했던 스호 원장의 죽음을 일본 언론이 그렇게 받아들일 리 없었다. 일본 언론은 이 엄청난 사건을 한 흉폭한 환자의 우발적 범행으로 몰고 갔다. 1930년대 이춘상은 중국에서 마적단 생활을 했고, 당시 우리나라 1930년대 근현대사를 확인해보면 마적단 활동으로 신분을 숨기고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들이 상당수 있다. 또한, 이춘상이 단순 마적단 이었다면 독립운동가 김창숙 선생에게 독립 자금을 제공하고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주러 두 번이나 갔었던 사실은 그가 단순한 마적단이 아니었다는 점을 강하게 시사한다. 결정적으로 당시 이춘상의 아버지 이수봉 선생은 독립운동가였다. 이것은 분명한 자료로 기록되어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많은 수의 잊혀진 영웅들이 그러하듯 이춘상 본인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다. 물증을 찾을 수 없어 정황만 추측할 수 있는 것이 안타깝다. 확실한 것은 일본에서는 큰 충격으로 여전히 남아 있는 존재가 우리에게는 어떻게 해방을 맞은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묻혀져 있었던 것일까 라는 의문이 남는다. 추측하건데, 이춘상이 한센병(문둥병) 환자였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실제로 이춘상은 족보에도 이름이 빠져있을 만큼 당시 한센병이라는 것은 받아들이기 매우 힘든 그 어떤 것이었다. 지금 우리 후손들은 이것을 자유롭게 말하고 생각해볼 수 있지만 오랜 시간 혈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에겐 받아들이기 힘든, 혹은 감추고 싶었던 사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는 한센병에 대한 사회적인 오해가 일단 크다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수 많은 잊혀진 영웅들이 그러하듯, 가진 자들과 힘있는 자들(‘기득권’)의 역사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 그 중에서도 사회적 약자로 불리었던 자들의 독립운동 이야기는 몇 십 년간 우리나라 교과서와 공무원 시험에서 제외되었다. 이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었음에도 죽어서도 불평등한 대우를 지금까지 받고 있는 것이다. 한센병 환자에 대한 인권 유린, 친일에 대한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죄’와 한센병에 대한 ‘무지’가 위대한 독립운동가를 지금까지 국민들로부터 잊혀지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 기자의소리
  • 2019년 08월 28일

<기획 오피니언>국회의원들의 작금의 사태 이대론 안된다

선거제 개혁,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설치 관련 법안을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하는 것을 두고 여야가 극한 대립으로 정치권의 '막말' 경쟁에 이어 폭력사태가 이어지고 있다. 국회의원으로서 일련의 사태들은 도가 많이 지나쳤다. 비단 이번뿐만 아니다. 몽니를 부리는 탓에 빈손 국회를 만들기 일쑤고, 다수 국민의 뜻과는 전혀 다른 선택을 통해, 일부로 국정에 차질을 빚게 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들을 지금껏 만들었다. 이 사태들을 볼 때마다 국민들은 국회의원 왼쪽 가슴에 달고 있는 금배지를 당장이라도 떼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그 국회의원이 자진사퇴하지 않는 이상 다음 총선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지방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 심지어 대통령도 국민들이 소환하고 탄핵할 수 있는 시대라고 하지만 국회의원만은 내 손으로 끌어내릴 수는 없다. 아무리 자질이 없는 국회의원이더라도, 내 속을 후벼 파는 국회의원이더라도 이들을 파면시킬 '법'이 없다. 이 때문에 '국회의원 국민소환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국민들의 요구가 점차 거세지면서 국민청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청원자의 말을 빌리면 그는 “국민인 내가, 나를 대신해 제대로 의정 활동하라며 권한을 위임했다. 그러나 작금의 국회의원, 특히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국민의 명령을 무시하며 오로지 정부 발목잡기에만 혈안이 돼 있을 뿐이다. 국민이 하찮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청원인은 국회의원을 견제하는 법적ㆍ제도적 장치는 단순히 국회의원을 파면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국회의원 스스로 윤리의식과 책임감 등 자정능력을 키우고, 국민에게 신뢰받는 성숙한 국회가 되는 수단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그는 “더는 우리 아이들에게 지금의 부끄럽고 썩은 정치를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도 했다. 국회의원을 소환할 수 있는 법안은 지금껏 잠자고 있다. 의원들의 불법, 비리, 망언 등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 조치들이 그들 국회에서 그들만의 방어로 법안은 계류 중이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016년 12월 김병욱 더불어민주당 의원, 2017년 2월 황영철 자유한국당 의원과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3명의 의원은 각각 국민소환제법을 대표 발의했다. 여야 의원들이 모두 국민소환의 필요성을 제기한 셈이다. 같이 발의한 의원들을 단순 산술하면 여야 62명이다. 법안제안 취지는 동일하다. 황 의원은 "국회의원이 헌법을 위반하거나 직권 남용, 심각한 위법·부당한 행위 및 국회의원의 품위에 맞지 아니하는 언행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경우에도 선거를 통한 정치적 책임을 지는 방법 외에는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며 "국민의 봉사자로서 성실히 의정활동을 수행할 수 있도록 유도함과 아울러 국회의원에 대한 국민의 민주적 통제방안을 마련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2006년에 제정된 '주민소환에 관한 법률'은 지방자치단체의 장과 지방의회의원에 대한 주민소환을 규정, 선출직 지방공직자에 대한 주민의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고 주민의 직접 참여기회를 확대할 수 있는 제도적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며 "그러나 지방자치단체의 장, 지방의회의원과 같이 선거에 의해 선출된 국회의원은 소환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고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국민소환제에 대한 국민적인 요구가 굉장히 세다. 국회의원 스스로 ‘자기 목에 방울을 다는 법’이니 당사자인 국회의원들은 소극적이다. 그러나 현재로선 국회의원들의 말과 행동은 ‘방울을 달아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법률안 심사와 의결은 국회의 권한이지만, 그 권한을 이제는 국민들에게 돌려 줘야한다. 제출된 법안을 소관 상임위원회의 심사도 거치고, 상임위에서 의결된 안건은 법제사법위원회에서 하루 빨리 본회의에 회부해야 한다. 또한 국회는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해야함이 국민들 뜻이다.

  • 김인하 논객
  • 2019년 04월 27일

<기획 오피니언> 4.16 그날, 세월호 현장을 취재한 기자의 단상

다시 돌아온 봄, 꽃은 피어야 한다 꽃이 지네 산과 들 사이로 꽃이 지네 눈물같이 겨울이 훑어 간 이 곳 바람만이 남은 이 곳에 꽃이 지네 꽃이 지네 산과 들 사이로 가수 김광석 노래 &lt;꽃&gt; 중 2014년 4월 16일 304명의 꽃이 졌다. 봄날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한 제주도 그 아름다운 제주도에 닿지 못하고 망망대해에서 침몰했다. 풋풋한 청춘들의 수학여행도, 단란한 가족의 부푼 꿈도 바다깊이 잠겼다. 세월호 승선인원 476명, 구조된 인원은 172명. 생존율은 36.1%였다. 그나마 생존자 172명 중 절반 이상은 고기잡이하던 어부들이 구조했다. 구조 가능했던 1시간 40분, 대한민국의 청와대와 해군, 해경은 무능했다. 물이 목까지 차올라도 구조를 기다렸던 304명은 끝내 구조되지 못했다. “그대로 있으라”는 선내 방송 후 그들만 황급히 세월호에서 빠져나갔다. 304명을 구조하지 않은 진실도 함께 침몰시키려는 시나오리가 시작됐다. 저 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 발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가수 양희은 노래 &lt;한계령&gt; 중 무고한 국민이 참사를 당했다. 조도 앞바다 거친 파도처럼 눈물을 쏟아냈다. 살을 에는 삭풍을 맞아가며 천막농성을 하고, 안산에서 진도까지 450Km를 걸었다. 하지만, 우리는 침묵을 강요당했다. 단순히 죽음을 추모하고 눈물을 흘렸다. 왜 구조되지 못했는지, 누구의 책임인지 물음에 그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 진실은 칠흑 같은 조도 앞바다에 감춰두고 통제되고 조작된 슬픔이었는지 모른다. 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잊지 않고 기억하고 다짐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구조하지 않은 304명의 꽃은 졌는데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김경일 해경 123정장. 304명의 목숨 값으로 단 한명만 처벌됐다. ‘부실구조’ 혐의다. 그의 부실구조는 누구의 지시에 의한 것인가. 구조하지 않은 304 명의 생명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나. 누가 처벌받아야 하나. "박근혜, 황교안, 김기춘, 김장수, 우병우, 이주영, 김석균, 이춘재, 김수현, 김문홍, 김병철, 소강원, 남재준, 성명불상의 해양경찰청 상황실 해경, 성명불상의 목포해양경찰서 상황실 해경, 성명불상의 청와대 직원, 성명불상의 해양수산부 직원, 성명불상의 국정원 직원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와 4·16연대는 지목했다. 탈출 지시를 하지 않은 범죄자들을 처벌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이들은 헌법상 국민 생명권과 국민 행복권을 유린한 책임자다. 부당한 압력을 넣어 수사를 방해하고, 진실은폐를 시도했다. ‘박근혜 7시간’의 행적을 감추기 위해 공문서 조작과 은폐를 주도했다. 꽃이 피네 산과 들 사이로 꽃이 피네 눈물같이 봄이 다시 돌아온 이 곳 그대 오지 않는 이 곳에 꽃이 피네 꽃이 피네 가수 김광석 노래 &lt;꽃&gt; 중 공소시효가 직권남용은 5년, 업무상 과실치사는 7년이다. 국민의 힘으로 책임자처벌을 위한 ‘국민 고발인단’에 참여해야 한다. ‘특별수사단 설치’를 위한 청와대 국민청원에 힘을 모아야 한다. 다시 돌아온 봄, 진실의 꽃을 피워야 한다. 4년 8개월간 광화문을 지킨 세월호 천막 자리에는 꽃이 피었다. 304명을 기억할 ‘기억과 빛’이라는 작지만 소중한 공간이 들어섰다. 목포신항과 팽목항에도 기억하고 다짐하는 공간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 곳에서 세월호가 들춘 부끄럽고 불편한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 그 동안 우리 사회가 얼마나 부조리했는지를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세월호를 기억하며 보다 안전한 사회를 향해 연대하고 다짐해야 한다. 다시 돌아온 봄, 꽃은 피어야 한다. 산과 들에 흐드러진 유채꽃, 벚꽃, 진달래, 철쭉처럼 겨우내 움츠렸던 속살을 드러내며 만개하는 꽃들처럼 지난 5년 동안 꽁꽁 얼어붙었던 진실의 꽃을 활짝 피워야 한다. 304명의 생명들이 가고 싶었던 제주도의 유채꽃으로, 조도 앞바다가 보이는 팽목의 벚꽃으로, 뭍으로 올라온 세월호가 보이는 목포 유달산의 개나리꽃으로, 집으로 가는 길목 소백산의 철쭉으로, 영취산의 진달래꽃으로 피어나 모든 이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 오마이뉴스 이영주기자
  • 2019년 04월 16일

<기자초대>오마이뉴스 이영주기자가 바라 본 '비 내리는 목포신항, 비에 젖은 녹슨 세월호'

14일 오전부터 목포신항에는 봄비가 내리고 있다. 녹이 슬어 있는 거대한 세월호도 빗속에 선체를 드러내놓고 있었다. 녹슨 세월호가 거치된 비 내리는 목포신항엔 우산을 쓴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전북과 부산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온 단체 추모객들은 삼삼오오 추모 사진전 등을 둘러보며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휴일을 맞아 가족과 함께 온 추모객들도 10여 팀이 있었다. 추모객들은 5년 전 참사를 기억하고 있는 녹슨 세월호를 묵묵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세월호는 2년 전인 2017년 3월 31일 목포신항에 도착한 뒤 육상 거치작업을 거쳐 2년째 그 자리에 있다. 선체 대부분이 녹이 슬고 일부는 부서진 세월호를 바라보며 일부 추모객은 눈시울을 글썽이며 낮은 목소리로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휴일을 맞아 가족과 함께 광주에서 목포신항을 방문한 정기식(41)씨는 "세월호가 목포신항에 거치될 때 와보고 2년 만에 왔는데 고철덩어리처럼 녹이 슬어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추모객들은 피해자 304명과 미수습자 5명의 사진 앞에서는 한명, 한명 얼굴을 살피듯 한참동안 머물렀다. 세월호잊지않기목포공동실천회의에서 마련한 부스 앞에서는 노란 리본에 추모글을 적어 세월호가 보이는 철조망에 묶었다. 철조망에 묶여 있는 노란 리본에는 "그곳에서는 따뜻하세요" "자주 못 와 죄송합니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등의 글귀가 적혀있다. 녹슨 세월호가 있는 목포신항에서는 지난 12일부터 추모행사가 열렸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던 지난 12일에는 추모음악회가 열렸다. 전남지역 학생 1천여 명으로 구성된 '꿈키움 드림오케스트라'와 416합창단이 무대에 올랐다. 이들은 '천개의 바람이 되어', '바람이 불어오는 곳' 등을 노래하며 304명의 희생자를 추모했다. 음악회에는 추모객 300여명과 김영록 전남지사, 장석웅 전남도교육감, 장훈 4·16 세월호 참사 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이날 장훈 4·16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은 "5년 전 304명의 국민은 아직도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면서 "세월호 참사 특별수사단을 설치해 진상규명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세월호 뒤 넓게 펼쳐진 바다는 우리들의 눈물" 13일에는 '기억하라 행동하라'를 주제로 기억문화제와 다짐대회가 열렸다. 목포 지역 학생 416명은 노란 추모리본을 만드는 플래시몹을 선보였다. 노란 추모리본 플래시몹에 참여한 학생들은 참사 당시 자신들과 비슷한 또래였을 희생자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목포지역 학생들을 대표해 추모사를 한 목포혜인여중 최미소(15)양과 목상고등학교 박주경(17)군은 "2014년 4월16일 그날 희생자들이 얼마나 고통 받고 무서웠을지 가늠할 수조차 없다"며 "세월호 뒤로 넓게 펼쳐진 푸른 바다가 우리들의 눈물로 보이기도 한다"고 희생자들을 애도했다. 이날 목포신항에서는 추모와 기억을 약속하는 노란종이배 접기, 엽서에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글을 유리함에 담기, 희생자의 고통과 생존자의 트라우마를 재연한 단막극 등 다양한 추모행사들이 열렸다.

  • 오마이뉴스 이영주기자
  • 2019년 04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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