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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감>바위에 새겨진 싯구가 신세를 한탄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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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감>바위에 새겨진 싯구가 신세를 한탄하는 듯 하다

조선 후기의 정통 성리학자로 본관은 은진, 자는 영보, 호는 우암. 주자의 학설을 전적으로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업을 삼았으며, 17세기 중엽 이후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서인노론의 영수이자 사상적 지주로서 활동했다. 보수적인 서인, 특히 노론의 입장을 대변했으며, 명을 존중하고 청을 경계하는 것이 국가정책의 기조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강상윤리를 강조하고 이를 통해서 국가·사회 기강을 철저히 확립하고자 했다.

우암(尤唵) 송시열(宋時烈) 암각시문(岩刻詩文)

 

그림11.png

 

팔십삼세옹 창파만리중 (八十三世翁 蒼波萬里中)

일언호대죄 삼출역운궁 (一言胡大罪 三黜亦云窮)

북극공첩일 남명단신풍 (北極空瞻日 南溟但信風)

초구구은새 감격움고충 (舊恩在 感激泣孤衷)

 

여든 셋 늙은 몸이

푸른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구나.

한 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일까

세번이나 쫓겨난 이도 또한 힘들었을 것이다

(()나라 학자 유하충(柳下忠)의 고사(故事)

 

대궐에 계신님을 속절없이 우러르며

다만 남녘 바다의 순풍만 믿을 수밖에

담비 갖옷 내리신 옛 은혜 있으니

감격하여 외로운 충정으로 흐느끼네,

 

여든 셋의 늙은 몸이 되어 푸른 바다 물결 헤치고 귀양 가는 길에, 거센 풍량 만나 쉬면서 생각하니, 임금의 옛 정을 생각하니 외로웠으리라. 임금 계시는 궁궐은 장희빈 세력에 의해 용상은 뺏기고, 제주도 먼 바닷길을 가려 하니 믿어야 할 것은 바람뿐이였음을,

 

옛날 효종 임금께서 이조 판서를 제수 할 적에 허름한 옷을 입고 나타난 우암을 보더니, 담비 가죽으로 만든 털옷을 하사, 그러나 이제는, 추위를 이기려고 효종 임금님이 하사한 담비 가죽 털옷을 입고 있는 우암. 이 모습을 생각하니 임금님의 옛정이 그리워 홀로 외로이 눈물 흘릴 수밖에,

 

그림09.png

 

전남 완도의 아름다운섬 보길도에 존재하는 "우암 송시열 글씐바위"의 글이다.

 

우암(尤庵) 송시열의 글쓴바위는 보길도의 선백도마을 앞 바닷가의 암벽을 말하며, 이곳은 조선 선조~숙종조의 대유학자인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왕세자 책봉문제로 관직이 삭탈되고 제주 유배길에 올라, 경치가 좋은 이곳에서 잠시 쉬며 임금에 대한 서운함과 그리움을 시로 새기어 바위에 새겨 놓은 것이다.

 

조선 후기의 정통 성리학자로 본관은 은진, 자는 영보, 호는 우암. 주자의 학설을 전적으로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업을 삼았으며, 17세기 중엽 이후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서인노론의 영수이자 사상적 지주로서 활동했다. 보수적인 서인, 특히 노론의 입장을 대변했으며, 명을 존중하고 청을 경계하는 것이 국가정책의 기조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강상윤리를 강조하고 이를 통해서 국가·사회 기강을 철저히 확립하고자 했다.

 

우암 송시열선생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그의 이름이 3000번 이상 올라있고 전국의 서원 42개소에 제향 되어 있으며 또한 성균관 문묘(文廟)에 역사상 거유 18현이 배향되어 있는데 그 중에 한분이며 또한 종묘(宗廟)에 묘정배향공신(廟庭配享功臣)이다. 그리고 대학자에게만 높여서 붙여지는송자(宋子)라는 성인의 칭호까지 받은 분이다.

 

1689(숙종15) 장희빈의 아들로 왕세자(王世子)를 책봉하자 시기상조라고 상소했다가 제주도에 유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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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0(숙종16)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서인이 되고 장희빈이왕후가 되어, 강상이 무너지고 정치가 난장판이 되었다. 간신배가 발호(跋扈)하여 모함중상으로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사사되고 간신배 김일경(金一鏡),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노론사대신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 김창집(金昌集), 이이명(?)이 억울하게 사사(賜死)되던 정치 암흑기였다.

 

제주도에 유배 중이던 우암 선생이 무사할 수 없었다. 민암등의 책동으로 국문을 받기 위해 상경 도중 정읍(井邑)에서 사약을 받고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난 것이다. 이때 선생의 나이 83세였다.

그림12.png

 

현자(賢者)의 죽음은 의연하였다. 사약을 받기 전날 그의 친지, 제자들이 가시는 모습을 뵙기 위해 운집하여 있었다. 먼저 사약을 받은 김수항이 자손들에게 이르기를 만일 우암 선생이 나보다 나중에 죽게 되거든 나의 묘지문(墓誌文)을 우암 선생에게 지어 달라.’는 유언을 하여 그 유언장을 가지고 친족되는 사람이 왔다.

 

그것을 본 우암은 그렇다. 문곡의 묘지문은 내가 지어야 한다.’고하고 지필묵을 가져오게 하여 붓을 들었다. 그리고 호화한 대문장일편을 지어주고 조용히 밤을 지낸 후 그 이튿날 오전에 사약을 받았던 것이다.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한 송시열은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것이었을까. 바위에 새겨진 싯구가 신세를 한탄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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